영국령 인도 제국의 흥망, 갈등과 저항의 역사

19세기 초반,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인도는 제국주의 지배의 운명을 맞게 됩니다.

1857년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영국 정부가 직접 통치에 나서면서 바야흐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보석, 인도 식민지 시대가 개막되었죠.

근대화란 미명 아래 자행된 약탈과 수탈, 저항과 혁명이 뒤엉킨 격동의 한 세기. 영국령 인도 제국의 명암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영국령 인도 제국3

1. 동인도 회사의 인도 진출과 식민 체제의 구축

영국이 인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무굴 제국의 쇠퇴와 함께 유럽 열강의 각축장이 된 인도. 그중에서도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역 거점을 잇따라 세우며 영향력을 확대해 갔는데요.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동인도회사는 벵골과 바하르, 오리사 등을 병합하고 막대한 세수를 거두며 인도 통치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로버트 클라이브입니다. 플라시 전투와 부왁서 전투에서 벵골의 통치자들을 굴복시킨 클라이브는 동인도회사의 세력 확장에 결정적 공을 세웠죠.

이후 리처드 웰즐리 총독에 의해 마이소르와 마라타 연맹이 제압되고, 델리의 무굴 황제가 폐위되면서 인도 대부분이 영국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됩니다.

19세기 초반에 이르면 동인도회사의 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집니다.

토지세 징수권을 둘러싸고 인도인 지주층과 결탁하는 한편, 관개사업이나 도로, 철도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에 투자하며 근대화의 명분을 쌓기도 했죠.

하지만 그 근저에는 인도의 풍부한 자원과 시장을 독점하려는 제국주의 야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인도 사회에 엄청난 혼란과 모순을 초래하게 됩니다.

 

2. 세포이 항쟁과 영국령 인도 제국의 수립

1857년 벌어진 세포이 항쟁은 영국 지배에 대한 최초의 무장봉기였습니다.

동인도회사 산하 용병인 세포이들이 총기에 돼지, 소 기름을 바른다는 소문에 반발하면서 시작된 항쟁은 델리, 캉푸르, 루크나우 등으로 번져나가죠.

나나 사히브, 락슈미바이 등 반영 세력의 지도자들도 가세하면서 전국적 저항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의 진압에 밀려 항쟁은 1년 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이를 계기로 동인도회사는 해체되고 인도 통치권은 영국 정부로 넘어가게 되죠.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 황제를 칭하며 직할 식민지화를 선포합니다. 영국령 인도제국의 틀은 이때 확립된 것인데요. 무력으로 반란을 누른 데 이어 분할통치로 민족의식을 약화시키려 한 것이 특징입니다.

한편 이 시기 영국은 서구식 교육과 법체계를 도입하는 등 개혁을 추진합니다. 토마스 맥콜리의 ‘영국식 교육’으로 대표되는 근대화 정책은 친영 지식인 계층을 양성하려 한 것이었죠.

하지만 이는 인도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이중적 통치가 빚어낸 역설이었죠.

영국령 인도 제국2

3. 간디와 인도국민회의의 독립운동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도 민족주의 운동은 본격화됩니다. 그 선봉에 선 것이 1885년에 창설된 인도국민회의였죠.

초기에는 지식인 중심의 온건한 개혁 운동을 펼쳤지만, 1907년 수라트 분열을 계기로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독립을 목표로 내세우게 됩니다.

틸라크, 라스 비하리 보스 등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시기였죠.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마하트마 간디입니다. 남아공에서 인종차별에 맞서 투쟁하며 평화적 저항의 철학을 체득한 간디는 귀국 후 국민회의를 이끌며 대중적 민족운동을 전개하는데요.

1919년 잘리안 왈라 바그 학살에 항의해 전개한 불복종 운동, 1930년 소금 행진으로 상징되는 소금 불법 제조 시위 등이 대표적입니다.

간디가 추구한 것은 비폭력 불복종이었습니다. 영국의 폭력에 맞서되, 평화적 방식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죠.

이는 안와르 칸과 함께 이슬람 세력을 규합한 카릴라프 운동이나, 브루흐 운동 등 1차 대전 이후 전개된 범이슬람주의 운동과도 맞물리며 대중적 호소력을 얻어갑니다.

물론 간디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거나 카스트제에 무관심하다는 지적, 지나친 비폭력주의가 영국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주장까지. 보스를 필두로 한 무장 독립 투쟁파와 네루 등

사회주의 성향 인사들과의 갈등도 적지 않았죠. 하지만 간디가 농민과 하층민의 지지를 이끌어낸 카리스마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4. 인도 독립과 분리 독립의 아픔

결국 인도 대중들의 거센 독립 열기에 영국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죠. 2차 대전으로 지배력이 약화된 영국은 인도의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하지만 힌두파와 이슬람파의 분열을 막지 못했죠. 지나친 에서 결별한 지나는 파키스탄 건국을 주장하며 무슬림 국가 수립을 내세웠고, 결국 영국은 힌두와 이슬람 분리 독립안을 받아들이고 맙니다.

1947년 인도는 드디어 독립을 쟁취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힌두-무슬림 간 유혈 분쟁이 벌어집니다. 최소 30만 명이 학살당하고 12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하는 참극이 빚어졌죠.

게다가 카슈미르를 둘러싼 영토 분쟁은 오늘날까지 인도-파키스탄 간 악연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분리 독립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간디는 힌두 극단주의자의 총에 맞아 서거하고 맙니다.

종교 간 화합과 평등을 부르짖던 위대한 영혼의 비극적 최후였죠. 간디의 제자 네루가 초대 총리를 맡아 근대 국민국가의 기틀을 닦아가지만, 남겨진 과제는 산적해 있었습니다.

식민지배의 굴레에서 벗어났음에도, 그 후유증은 고스란히 인도 국민의 몫으로 돌아왔던 것이죠.

 

5. 영국령 인도 제국의 빛과 그림자

2백여 년간의 영국 지배는 인도에 근대화의 풍경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영국식 교육과 관료제, 철도와 통신망 등 사회기반시설의 확충은 인도를 근대 국가의 체계로 이끈 원동력이었죠.

제한적이나마 대의제 요소를 도입한 통치 방식도, 독립 후 인도가 ‘세계 최대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일조했다 볼 수 있겠네요.

그러나 제국주의 지배가 남긴 상처와 후유증 또한 간과할 수 없습니다. 영국 상인과 지주의 이익을 위해 인도 농민과 수공업자들은 처참한 수탈을 당했고, 빈민층으로 전락하는 이들이 속출했습니다.

게다가 힌두-무슬림 분열을 야기한 분할통치는 독립 후에도 종교 갈등의 불씨로 이어졌죠. 까스트제의 강화 역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고요.

이처럼 근대화와 약탈이 교차한 영국령 인도 제국사. 양면성을 지닌 제국주의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인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영국풍 건축물이 야성적인 슬럼가와 공존하는 광경, 첨단 IT산업의 허브 방갈로르와 피폐한 농촌의 극명한 대비. 여전히 인도는 과거의 질곡과 씨름하며 내일을 모색하고 있는 셈이죠.

 

이번 주제의 관련 콘텐츠를 소개해드리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책 : 『영국령 인도 제국』 데이비드 길먼 지음 | 이순호 옮김 (한길사, 2010)

  • 200여 년 영국 지배의 역사를 망라한 개설서. 정치경제적 변동상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영화 : 『간디』 (1982, 리chard Attenborough 감독)

  • 간디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그린 대하드라마. 벤 킹슬리의 열연이 압권입니다.

다큐멘터리 : KBS 『인도, 갈등의 역사』 (2007년 방영)

  • 인도의 격동의 근현대사를 추적한 3부작 시리즈. 식민지 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조명합니다.

유적지 : 델리 빨간 요새 (Red Fort)

  • 17세기 무굴 제국 때 세워진 웅장한 궁전. 영국령 시절엔 병영으로 쓰였고, 독립 후엔 독립기념관으로 거듭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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