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를 둘러싼 유럽 열강의 각축, 그 빛과 그림자

 

15세기 후반, 신항로 개척과 함께 아시아로 뻗어 나간 유럽의 팔. 동남아시아는 그들에게 무한한 부와 영광을 약속하는 신대륙이었습니다.

후추, 정향, 육두구 등 값비싼 향신료가 가득한 무역의 보고이자, 광활한 영토와 자원을 품은 미지의 땅. 동인도 무역을 둘러싸고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이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게 되는데요.

식민 지배의 명암이 교차하는 동남아시아 근대사의 서막, 유럽 열강의 각축장을 들여다보겠습니다.

 

1.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점 경쟁

16세기 초 최초로 동남아 무대에 뛰어든 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습니다.

교황의 중재로 신대륙을 양분한 두 나라는 동방에서도 패권 경쟁을 벌였는데요.

먼저 포르투갈이 말라카 해협에 거점을 마련하고 향신료 무역을 장악합니다. 말라카, 마카오 등 동남아 전역에 식민 도시가 세워지고 가톨릭 선교사업도 펼쳐졌죠.

그 사이 스페인은 마젤란 원정대를 파견해 필리핀에 상륙합니다. 에스파냐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죠.

마닐라를 거점으로 멕시코와 향신료 무역을 벌이는 한편, 가톨릭을 전파하며 문화적 동화 정책을 폈습니다. 300년 넘게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필리핀은 지금도 동남아에서 유일한 가톨릭 국가로 남아있죠.

식민지 쟁탈전2

2.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패권 장악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무역 대국으로 발돋움한 네덜란드가 동남아 시장에 뛰어듭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VOC)를 앞세워 인도네시아 제도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게 되는데요.

1602년 암스테르담에 설립된 민간 기업 VOC는 주주를 모집해 자본을 확보하고, 식민지 운영 특허권까지 부여받은 초국적 기업이었죠. 오늘날 다국적 기업의 원조격이라 할 만합니다.

VOC는 무력으로 현지 술탄국들을 굴복시키고 할렘, 반튼 등 주요 거점을 장악해갑니다. 바타비아(자카르타)에 아시아 총괄 본부를 세우고, 말루쿠 제도와 반다 제도 등 향신료 주산지를 독점하며 막대한 부를 쌓아갔죠.

또한 강제 경작제를 도입해 커피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확대하고, 현지인들을 노예처럼 혹사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17세기 말 무렵 타이완 남부에도 식민 도시를 건설하고 청나라와 무역을 주도하지만, 정성공 세력에 밀려 1662년 철수하고 맙니다.

이후 동남아 일대에 세력을 집중하면서 18세기 중엽까지 황금기를 구가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와의 경쟁에서 밀리며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3. 영국과 프랑스의 동진 정책

18세기 후반부터는 영국이 본격적으로 동남아 시장에 진출합니다.

아편전쟁 후 홍콩을 할양받고 중국과의 교역을 주도하던 영국은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 북부에도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는데요. 페낭, 싱가포르, 말라카 등 해협 식민지를 연결해 동서양을 잇는 무역로를 장악합니다.

설탕 플랜테이션을 위해 인도, 중국에서 노동력을 끌어들이고, 화교 자본과 결탁해 주석 광산을 개발하며 말레이 경제를 주무릅니다.

19세기 후반에는 미얀마를 식민지화하고, 태국과의 불평등조약을 맺어 절충 무역의 특권을 확보하죠. 이 시기 프랑스도 인도차이나반도에 식민지를 개척합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등을 점령하고 고무와 쌀 플랜테이션을 확대해 나가죠.

이처럼 19세기 말엽이 되면 동남아시아 대부분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특히 미얀마부터 말레이,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도서부 동남아는 영국이, 인도차이나반도는 프랑스가 호령했죠. 필리핀만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었고, 타이는 영국과 프랑스의 완충지대로서 형식적 독립을 유지합니다. 유일하게 식민화를 모면한 셈이죠.

식민지 쟁탈전3

4. 제국주의의 빛과 그림자 유럽 열강의 식민 지배

동남아시아에 근대화의 물결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행정, 군사, 사법제도를 정비하고 서구식 교육을 확대한 것. 또 철도, 도로, 항만, 통신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구축한 것은 물질적 토대를 마련한 셈이죠.

이는 후일 독립국가 건설의 기반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강압적 수탈과 차별, 인권유린의 dark side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강제 노역과 인종차별로 현지인의 자존감은 짓밟혔고, 전통적 가치관과 질서도 뿌리째 흔들렸죠.

간접통치를 앞세운 분할지배는 종족과 종교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정치적 예속화와 경제적 종속구조는 제3세계라는 낙인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겨졌습니다.

식민주의 잔재 청산은 동남아시아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화두 중 하나입니다. 탈식민화와 근대화의 이중과제를 안고 독립을 쟁취한 뒤에도 그 후유증은 곳곳에서 되살아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내 국가들은 아세안(ASEAN)이라는 연대의 틀을 마련해 평화와 공동번영의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상생과 화합의 지혜로 아픈 역사를 딛고 새로운 동남아시아를 설계하려는 의지의 발현이기도 합니다.

유럽 제국주의의 각축장이 되었던 동남아시아. 근대사의 격랑 속에서 시련과 번영이 교차했던 현장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풍요와 안정 이면에는 그처럼 질곡의 역사가 응축되어 있는 셈이죠.

식민주의의 상처를 딛고 평화를 일구려는 동남아인들의 염원이 결실을 맺기를 바라봅니다. 평등과 공존의 새 질서 위에 다양성이 꽃피는 미래, 그날을 향해 우리 모두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할 때입니다.

동남아의 격동의 근대사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추천 콘텐츠를 소개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책 – 『동남아시아사』 김동엽 지음 (소나무, 1998)

  •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동남아 역사 전반을 조망하는 개설서. 방대한 시공간을 관통하며 통사적 이해를 돕습니다.

 

영화 – 『연령이 없는 그대에게』 The Lady (2011)

  •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 아웅산 수치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 영화. 군부독재에 맞선 그의 삶을 통해 식민주의 잔재의 극복을 보여줍니다.

 

다큐 – KBS 『역사스페셜-동남아』 시리즈 (2006)

  • 베트남전쟁부터 아웅산 테러, 반공 대학살까지. 격동의 20세기 동남아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짚어봅니다.

 

역사의 풍경은 불변의 진리를 간직한 채 시간의 강을 흐릅니다. 겉모습은 바뀌어도 흐름의 본질은 변함없이 이어지는 법이죠. 우리가 과거를 탐구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동남아시아를 휩쓸고 간 근대의 회오리 속에서 제국과 식민지의 삶을 돌아보는 일, 그것은 역사에서 오늘을 성찰하고 내일을 모색하는 지혜의 탐구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마음속에 이런 질문을 던져보시면 어떨까요? 유럽 제국주의의 팽창이 낳은 빛과 그림자는 무엇일까? 식민 지배를 경험한 사회는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걸까?

그 아픔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길은 무엇일까? 비극의 역사에서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갈 실마리,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역사를 보는 따뜻한 시선이 절실한 때입니다. 학대받은 약자에 공감하고 상처 입은 영혼을 위무하려는 태도, 그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역사관이 아닐까요?

억압과 차별을 넘어 화해와 연대로 나아가는 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고 평등한 공존을 모색하는 지혜. 아시아의 동틀 녘을 밝힐 희망의 빛, 동남아시아인들과 함께 그 길을 열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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